어디선가 향긋한 냄새가 난다. 흰 눈이 살포시 녹은 양지바른 논둑에서 봄의 전령이 비죽 얼굴을 내민다. 야들야들한 연초록 잎사귀는 생기를 가득 담고 있으니 밥상 위에 봄나물이 오를 때가 되었다.     
글·사진 이동미(여행 작가)


 
태백산맥의 1천 m가 넘는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정선, 앞산과 뒷산을 이어 빨랫줄을 걸었다는 강원도 정선 땅은 산이 절반이다. 이리저리 둘러보아도 온통 산이다. 보물을 잔뜩 숨기고 있는 보물 상자 말이다. 겨우내 꽁꽁 숨겼던 보물들은 봄이 되면 조심스레 그 모습을 내놓는다. 냉이 달래 쑥 쑥부쟁이가 고개를 들고, 원추리 취나물 고사리 두릅 참나물 얼레지가 보인다. 꽁꽁 얼었던 땅이 마르면 그 사이를 헤집고 나와 순박한 정선 아주머니의 손에 이끌려 세상 구경을 하는 곳이 바로 정선 오일장이다.

자연이 주는 밥상, 봄나물
정선 오일장. 끝자리 2·7일에 열리는 정선 오일장은 전국 팔도에서 사람들이 몰려들 정도로 이름난 곳이다. 시장통을 거니노라면 생닭을 직접 튀겨주는 통닭집이 정겹고, 흙이 잔뜩 묻은 푸성귀가 얼굴을 내밀며 사람들을 반긴다. 싱싱한 땅위의 날것들이 내는 아우성이 들린다.

“어머, 이거 냉이네요. 맛있겠다. 근데 자기야~ 마트에도 냉이가 있었지?”
“이거는 낭구(나무)하다가 산에서 캔 거래요!”

냉이라고 다 같은 냉이인가. 비닐하우스에서 물 주고 온도 맞추고 바람을 막아 키운 냉이와 어찌 같을 수가 있는가. 흰 눈 덮인 밭둑과 양지바른 산비탈에서 온갖 추위와 바람을 이겨내고 따스한 봄 햇살에 기지개를 펴며 자라난 냉이는 향부터 다르다. 진한 야생의 봄 향기가 묻어 있다. 이파리가 오밀조밀한 냉이를 사다가 하얀 뿌리와 잎 사이 흙을 말끔히 씻어내 뚝배기에 안치고 된장을 알맞게 풀어 바글바글 끓이면 봄맞이가 따로 없다. 멸치를 몇 마리 넣으면 더욱 좋고 바지락이나 모시조개를 넣으면 금상첨화, 역경을 이겨낸 강인한 면역력과 봄의 생기가 온몸에 퍼진다. 

정선장에 강냉이 가지고 댕기미 장사했드래요
정선장은 1966년에 개설됐다. 인구 감소로 쇠퇴하던 장이 전기를 맞은 것은 1999년 3월 ‘정선 오일장 관광 열차’가 운행되기 시작하면서다. 장이 서는 날에 운행하는 아리아리열차를 타고 온 서울 사람들로 정선장은 북적북적하다. 평소보다 긴 시장이 형성되는데, 요즘 같은 봄날에는 데쳐 초고추장에 찍어 먹으면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두릅이 자글자글 할머니의 무르팍에 소복하고, 정선 아가씨 속살처럼 희디흰 속살을 자랑하는 달래가 다소곳하게 똬리를 틀었다. 번철에 기름 두르고 밀가루 풀어 구우면 향긋함이 사흘을 간다는 미나리도 있다. 곤드레나물은 쌈 싸 먹고 무쳐 먹고 말려서 저장했다가 곤드레나물밥을 해 먹는다. 방금 한 곤드레나물밥에 양념장을 얹어 쓱쓱 비벼 먹으니 거친 나물의 질감과 고소함이 잘 어울린다. 곤드레나물 옆 취나물은 알싸한 향이 일품이니 비타민 C 함량이 월등히 높은 봄나물은 인체의 생기를 일깨우는 촉진제 역할을 한다.

그래서일까? 봄나물은 먹는 의식도 따로 있었으니 오신채(五辛菜)를 먹는 입춘절식(立春節食)이 그것이다. 오신채라 하면 시대와 지방에 따라 종류가 다르지만 파와 다진 마늘, 자총이, 달래, 평지, 부추, 무릇, 미나리의 새순 가운데 노랗고 붉고 파랗고 검고 하얀 다섯 가지 색 봄나물을 의미한다. 봄이 되면 우리 조상들은 오신채를 무쳐 먹었는데 맵고 쓰고 시고 쏘는 오신채를 먹음으로써 험한 세상 살아가면서 만나는 인생오고(人生五苦 : 인생의 다섯 가지 괴로움)를 상징했다. 궁중 임금님도 노란색 싹을 한복판에 놓고 동서남북에 청 적 흑 백 사방색(四方色)이 나는 나물을 놓았는데, 임금을 중심으로 하여 사색당쟁을 초월하라는 정치 화합의 의미가 있다고. 양반가에서는 가장을 중심으로 가족의 화목을 이루고 자손들에게는 인의예지신을 일깨웠다. 온 백성이 자신의 처지에 맞게 마음가짐과 바람을 다졌으니 봄나물은 그저 단순한 봄나물이 아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자연의 이치를 담고 있음이다.

인정을 담아 파는 정선 오일장
나물 집 옆으로 지글지글 메밀전병이 입에 착착 붙는다. 그 옆에는 올챙이국수가 있다. 불린 옥수수를 맷돌에 넣고 곱게 간 다음 체에 걸러 건더기를 걸러 가마솥에 붓고 저어주면서 뭉근히 끓여 걸쭉해지면 구멍 숭숭 뚫린 바가지에 넣고 숟가락으로 비볐다. 힘이 많이 들어간 첫 부분은 굵고 통통하지만 끝 부분은 가늘고 힘없는 모양으로 떨어지니 마치 올챙이 형상이라 붙은 이름이다. 양념간장을 얹어 한 그릇 후루룩 먹으면 씹을 것도 없이 목구멍으로 술술 넘어가며 올챙이마냥 금세 배가 불뚝해진다.

떠돌이 장꾼들의 좌판부터 시골 할아버지 할머니가 끼고 온 오리 토끼 강아지 씨암탉에 흑염소까지 나와 있다. 집에서 수확한 농작물을 내다 파는 할머니는 자투리 공간을 이용해 수수부꾸미와 찹쌀부꾸미를 즉석에서 부쳐 판다. 또 장날에는 정선아리랑 민요 마당, 전통 음식 체험, 마술 공연 등 다양한 이벤트가 열린다. 특히 오후 4시 30분이면 정선문화예술회관에서 ‘정선아리랑극’ 상설 공연이 펼쳐진다. 정선아라리 특유의 유장한 가락과 구성진 사투리가 만나 관객들의 기립 박수와 어우러진다. 산나물 향기에 취하고 전통 가락에 마음을 빼앗기면서 오일장의 하루가 무르익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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